그 남자의 성장기
SBS <스토브리그> 이신화 작가
글·사진 김선미 편집자
장소 여의도 더샵 집필실
프로야구 꼴찌팀에 새로 부임한 단장이 시즌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스토브리그>. 쉽게 선보이지 않는 스포츠 드라마를 향해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에는 기대감과 날 선 시선들이 뒤섞여있었다. 안정적으로 출발하는 듯했던 시청률은
회를 거듭할 때마다 꾸준히 오르더니, 마침내 최근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19.1%이라는 시청률로 마지막 회를 장식했다. 틀을 깬 신인 작가의
반란이라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토브리그>는
일찍이 2016년 MBC 극본공모에서 우수상에 당선됐지만
제작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SBS에서 제작이
이루어지기까지 4년. 그간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한 걸까. 편성회의 당시 만장일치를 이끌어낸 것도 모자라, 스포츠 소재로 첫발을
내딛는 신인 작가에게 금토 황금시간대 편성이 주어졌다.
신인작가들이
괴담을 많이 듣거든요. 편성이 어떻게 엎어졌다더라, 제작사에, 방송국에, 감독에게 어떻게 당했다더라 하는 것들… 저는 그게 다 실제에 기반한 것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저는
일단 제작사와 협의하면서 정말 좋은 대본을 ‘같이’ 만들었어요. 제가 만들어놓은 초안과 주인공 캐릭터에 대해 제작사에서 충분히 이해를 하고 계셨고 그 표현을 위해 어떤 방식이
좋을지 제안하는 유의미한 회의를 많이 했었죠. 연출부에서는 먼저 자체적으로 회의를 따로 해서 정리된
의견을 가지고 와서 저한테 얘기를 해주셨어요. 어떤 식의 표현을 원하는지, 생각하는 톤이 어떤 것인지. 원했던 것 이상으로 구현이 잘 됐죠.
감독님과 남궁민 배우를 만났을 당시 두 분 다 이 작품을 하기로 확정한 상태가 아니었는데, 제 대답들이 너무나 준비가 다 돼 있었다는 데서 확신을 가졌다고 하시더라고요.
대본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건 저잖아요. 어떻게 가야 하는 이야기인지 잘 설명하고 나서부터는
신인임에도 작가로서의 존중을 기성작가 못지않게 받았다고 생각해요.
감독님을 비롯한 팀원들, 배우들도 서로 양보해주고 기다려주고. 그게 가장 이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김다운 기획 PD님의 도움이 정말 컸고, 박세미 보조작가도 취재를 너무 잘해주고 좋은 의견을 많이 줬어요. 다 너무 감사하죠. 저는 미니 한 편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분명히. 대본을 만들면서 정말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의 맛을 각본으로 살려낼 수 없기에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것이 스포츠 드라마지만, 이신화 작가는 <스토브리그>가
스포츠를 소재로 할 뿐 스포츠로 재미를 주는 드라마가 아닌 오피스 드라마였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촬영하는
장면들은 주로 사무실이었어요. 철저히 프론트들이 비시즌인 스토브리그라는 기간 안에 해야 하는 업무를
가지고 구성을 하고 에피소드를 만들었죠. 시청자들이 야구를 모르는데도 재밌다고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큰 틀에서도 고민했어요. 제작진 중 야구를 잘 아는 사람들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부분이 이해가
가는지, 이해가 안 가서 재미가 없는지, 혹은 모르겠는데도
상관이 없었는지 의견을 고루 묻고 반영했고요. 사람들이 ‘야구
드라마인줄 알았는데 오피스 드라마야’라고 추천을 하면서 입소문으로 시청률이 꾸준히 상승곡선을 타기를
바랐어요. 대본만의 힘이 아니라 ‘배우가 정말 연기 잘하더라’ ‘연출 정말 좋더라’ 이런 것들이 포함돼서 말이죠.
백승수라는 인물이 꼴찌팀인 드림즈 구단에 단장으로 와서 팀에 변화를 주고 성장시켜가지만 사실 진짜 성장하는 사람은 백승수 자기 자신인 이야기. 대본을 키워나가면서 자기 자신이 성장했다고 말하는 작가 자신과 어딘가 닮아있는 듯했다. 비선수 출신 단장으로 선수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승수는 팀의 부진한 성적과 선수 개개인의 역량을 조목조목 분석한 근거들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지휘봉을 휘두른다. 그 움직임은 권위적이지도 강압적이지도 않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만 해서 그저 말문이 막히게 만들어버릴 뿐. 이신화 작가는 백승수 캐릭터를 두고 자신과 절반은 닮았고 절반은 닮고 싶은 모습을 그린 것 같다고 했다.
백승수라는
캐릭터에서 꼭 지키려고 했던 성향은 ‘합리성’이었어요. 이 사람이 윗사람을 들이받는 명분을 합리성에서 가져오는 거죠. 합리적이면서도
실리를 굉장히 중시하는 인물이에요. 서영주(차엽 분) 포수가 협상 때 무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말에 백승수는 “무례한
건 태도니까 상관없습니다. 무례하라고 하죠.” 이렇게 얘기를
해요. 또 선수 트레이드 건으로 직원들에게 프레젠테이션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내가 단장이니까 내 권한이야’라고 통보를 하는 게 아니라 설득을
하는 과정이에요. 물론 트레이드는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거기 때문에 실제로는 없는 과정을 보여준 거긴
하지만 그 장면이 드라마적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 거라고도 생각했어요. 이 사람이 싸워나가는 방식을 초반에 보여준 거죠. 합리라는 낡은 무기 하나를 가지고 싸워나간다는 것. 저도 불합리한
걸 참는 게 되게 힘들거든요. 그 외에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지고 감당하려는 모습도 비슷한
것 같아요. “내가 약해지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지니까”라는
말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되게 잘 표현해주는 대사예요. 결국 마지막에 이세영 팀장(박은빈 분)과 드림즈로 인해서 “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사실 저는 아직
그렇게까지 살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길고 긴 준비 기간을 보상이라도 받듯 편성 이후와 온에어 과정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지만 <스토브리그>가 세상에 선보여지기까지의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교육원에 다니기 위해 급식소 아르바이트를 불사하며 글쓰기를 놓지 않았고, <다큐프라임>과 <지식채널e> 등 여러 구성다큐 프로그램과 <브레인> <넝쿨째 굴러온 당신> 보조작가를 거치기도 했다. 2014년 코리아 드라마 페스티벌 창작극본 공모에서 <조금 늦은 결혼식>으로 우수상이라는 첫 결실을 얻고, <스토브리그>로 이름을 알리기까지 10년.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화려한 데뷔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스토브리그 작가’라는 타이틀. 종영도 하기 전부터 거론된 시즌 2에 대한 생각과 차기작에 갖는 부담에 대해 물었다.
일단
시즌 2는 ‘이럴 거면 돌아오지 말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할 자신이 있을 정도로 아이디어가 많이 차올랐을 때 써볼 생각인데요. 그냥 상상해봤을 때 제가 생각한 확실한 방향성은 야구이고 드림즈가 나와야 해요. 돌아온 백 단장이 되고 그들이 새로운 과제를 떠안는 이야기일 거 같아요. 똑같이
스토브리그 기간에 하는 이야기일 거고요. 그 안에 쓰지 않았던 소재나 약간의 캐릭터들이 추가로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차기작에서 뭔가 새로우려는 욕심은 사실 전혀 없고요. 좋은 메시지를
재밌게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 같아요. 재미와 교훈, 그
두 개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실망시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좀 있어요. 기대치도 생겨있고. 근데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게, 성적의 측면보다는 메시지가 잘못 전달되는 것에 대한 걱정인 것 같아요. 좋은
메시지가 아니거나, 좋은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않는 것. 제작사
대표님과도 <스토브리그>에 관한 부분은 잊자고
얘기했어요. 그냥 두 번째 작품을 하는 작가다, 그 정도의
책임감만 갖자고요.
“해봐야 알겠지만 열심히 할 겁니다.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특별할 것 없는 백승수의 담담한 말에 위안을 얻은 건 나 뿐일까. 자신의 역량을 믿고 결과를 확신하며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배포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결과와 실체 없는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고 내 갈 길에 집중하는 뚝심을 키우고 싶어지는 순간이다.